어떤 이에게는 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불행한 소식이 될 수도 있겠지만, 6년 전 암 진단을 받은 나에게는 그것이 희소식이었다. 그 동안 움켜쥐고 있던 짐들을 다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내가 움켜쥐고 있었던 것은 비어 있는 작은 주먹 하나뿐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한 단체를 통해 몸과 마음의 수련을 시작했다. 잔잔했던 겉 생활과는 달리 내 마음에는 상처가 많았고 인간관계 속에서 가슴속엔 늘 소용돌이가 쳤었다. 겉으로 당당한 모습이었지만 그 뒤에는 스스로를 무능하고 가치 없다고 자책하는 자아가 도사리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지치고 피곤했다. 그러한 것들을 해결하는 길을 찾은 것이 몸과 마음의 수련이었다.
수련을 시작하면서 내 마음속 한 편에는 멋지고 강한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와 소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목표는 나를 몰아붙이는 힘이 되었다. 어떤 훈련도 나를 두렵게 하지 못했다. 허약했던 육체도 일으키고 또 일으키니 마음이 원하는 대로 잘 움직이게 되었다. 나태한 생각이 들어오면 바로 물리치고 해야 할 일을 계획하고 움직이는 쪽으로 만들어 갔다.
몸과 생각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잡념이 없어지고 단순해지자, 명상이 깊어졌다. 그 속에서 우주를 체험하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눈을 감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단체의 일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내 눈에 여러 가지 비합리적인 일들이 비쳤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목표와 틀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사람을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간혹 나 자신조차 원하지 않는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 가슴 아픈 일이 많아졌다.
그래도 내 마음속에는 단체의 판에 박힌 성향을 조금씩 바꾸어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지구상의 일이라면 어디에나 그런 부조화쯤은 있을 수 있는 거라 생각했기에, 부지런히 그 안에서 내 길을 걸었다. 즐겁고 아름다운 교류도 많았다. 그런 교류를 통해 나의 오랜 습관을 발견하고 바꾸는 과정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단체의 모습은 바뀌지 않았고 내 고민도 깊어졌다. 단체가 커지고 나름대로 체계가 생기면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굴러가며 개성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에다가 가까이 가서 본 스승은 기쁨이 아닌 분노의 모습을, 자애가 아닌 미움과 복수의 표정을, 조화가 아닌 독선과 아집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나는 목표를 세웠지만 가는 길을 몰랐다. 그 길을 가는 데엔 스승이 필요했던 것인데……. 갈 길이 막막해졌다. 이것이 끝이 아님을 알겠는데, 그 다음 발걸음은 어디로 내디뎌야 하는가. 나의 의지는 강해져 있었지만 나는 자유롭지 못했고 행복하지도 못했다. 고민과 갈등은 가슴을 황폐하게 했고 몸의 건강도 기울게 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삐걱거렸다. 허무의 벼랑까지 가 있었던 것이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무의미했다. 말하자면 진정한 사망 상태였던 것 같다.
점차 몸을 일으켜 앉힐 수 없게 되었고, 밤엔 잠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몇 년 간의 외국 생활을 접고 고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돌아오자마자 병원으로 갔고, 말기 암 판정을 받았다. 그 엄청난 진단 앞에서 내 얼굴에는 안도의 웃음이 새어나왔다.
‘야호! 이젠 나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핑계대지 않고 쉴 수 있다! 선택할 필요도 없다. 쉴 수밖에 없다!’
병원 생활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사람 사는 세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검사 하느라 금식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아기자기한 놀이 같았다. 검사 기구들도 찬찬히 살펴보니 재미난 구조로 되어 있었고, 그것을 발명하고 만들어낸 사람들의 사랑과 정성을 품고 있었다. 예전에 무시하고 고개 돌렸던 물질적인 것들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의사와 간호사, 직원들과 입원실 환자들, 방문객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새롭고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병원 침대 위가 이처럼 행복하다니, 천국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술을 하고 퇴원을 했지만 골반에 전이되어 크게 자리 잡은 종양은 쉽게 치료되지 않았다. 먼저, 의사들이 의약 분업에 반대하기 위한 파업을 하느라 분주해지자 전이된 종양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고, 나중에 발견하고서도 별 조치를 하지 않았다. 또 다른 병원으로 옮겨 이런 저런 치료를 받았지만 그 때마다 병소는 오히려 더 커졌다. 마침내 진통제 처방을 받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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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癌)과 계약 동거를 선언하고
5년 전 진도에 내려온 그는 어느덧 진도사람이 되었다.
그는 임회면 귀성마을 어귀에 ‘자연의 집’을 짓고, <명상치료공동체>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명상을 통해 참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며, 명상과 대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자연의 집’을 열어두고 있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문이 없다” |
종양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갔다. 큰 근육과 신경이 지나는 곳이다 보니 통증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느다란 몸은 더욱 야위어 뼈와 가죽만 남아 앙상해졌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니 낮에 누워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누워서 커다란 유리창을 가득 채운 하늘을 바라보며 지냈다. 햇살이 투명하고, 구름이 아름다웠다. 구름은 시시각각 다른 모양의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렇게 누워 구름을 바라보는 것이 행복했다. 그렇다. 행복했다! 문득 놀라웠다. 내가 행복하다니!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손을 놓고 지내는 내가 행복하다니.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존재 그대로가 행복이었다.
아픔이 극심했지만 다행히도 바둑을 두면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나는 컴퓨터를 가지고 자주 밤샘 바둑을 두었는데, 나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지새우며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는 데에 놀랐다. 상대방에게 무조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 긴 밤의 통증을 홀로 다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와 나는 예기치 않게 서로에게 위안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감사의 샘물이 넘쳐나도록 해 준 이들이 많았다. 기도모임을 하며 속이야기를 나누고 속사람을 키우며 기쁨을 함께 했던 벗들이 있었다. 나는 암으로 해서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무기로 해서 기도모임을 자주 가졌다.
또, 농사를 짓는 할머니, 할아버지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지혜와 지식의 차이를 명백히 보게 해 주었고, 인간의 진정한 품위가 무엇인지 느끼게 해 주었다. 따뜻한 연민으로 나의 작은 몸을 안아주고 어루만져 주었으며, 그들의 죽음은 삶의 한 과정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인터넷을 통해 만난 여러 벗들도 있었다. 먼 길을 달려와 관심과 사랑을 보여 주었으며, 생각과 마음을 나누고 소소한 생활의 면면까지도 같이 했다. 그러한 교류는 생명을 느끼게 해 주었다. 교류 자체가 생명이었다. 생명은 몸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었고, 내 몸이 겪는 아픔도 결코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분신들인가!’
아픔 때문에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서성거리면서도 마음은 고통에서 멀었다. 여전히 숨은 감미로웠다. 눈을 떠서 거울을 보면 몹시 기울어진 몸이었지만 눈을 감으면 나는 지극히 건강했다. 그 느낌이 몹시도 이상해서 자꾸 눈을 감아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너무도 건강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참 희한하다!’
멋지고 강한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로 마음공부를 시작했지만 나는 허무의 벼랑 끝으로 갔고, 이제는 형편없이 기울어진 몸을 가지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돌연 내 자신이 아름답고 거룩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내면에서 솟구치는 기쁨이 떠나지 않았다.
간혹 아침 햇살을 이마에 받으며 ‘주님, 기쁨의 바다이신 당신 품으로 영원히 데려가 주세요.’라는 기도를 올리곤 했다. 그런데, 기도 끝에는 그것이 현실화되기엔 아직 좀 멀었다는 느낌이 오곤 했다. 그러면 다시 ‘내 몸이 쓸모가 있을까요? 매일 커지는 종양을 보면 이 몸이 그다지 쓸모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누워서 가만히 있어야 할지 일어나서 새로운 만남을 가져야 할지 헛갈립니다. 이 둔한 감각으로도 알 수 있는 방법으로 대답을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올렸다. 아무 대답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거나 만남도 삶도 계속 되었다.
2003년이 되자 우연한 기회로 어느 암 센터를 알게 되었다. 통증이라도 줄여볼 생각으로 그곳에 가서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치료 방법은 수술뿐이었다. 수술이 가능하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골반의 절반을 쪼개어 내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놀라운 체험들을 가져다주었다.
오른쪽 골반과 다리가 없어져서 나의 거동은 더 불편해졌다. 몇 달 동안을 침대에 붙박여 지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훨씬 자유로워졌다. 내 몸을 부끄러움 없이 다른 사람에게 내맡길 수 있었다. 모든 도움의 손길을 자연스럽고 즐겁게 받아들였고, 그 손길들은 바로 나의 것임을 뼛속 깊이 알 수 있었다. 남은 존재하지 않았다.
병실의 벗들은 바로 나의 분신이었고, 각자가 가져야 할 체험들을 충실히 겪고 있었다. 곁에 누워 있던 많은 벗들이 차례로 육신을 벗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삶과 죽음을 하나로 엮어 주었다. 덕분에 죽음은 나와 친해졌고 내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병실을 천국으로 만들었던 벗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그 얼굴들이 웃고 있다.
수술한 몸이 회복이 되자, 몸엔 살도 붙고 기운도 생겼다. 가슴에 지녔던 꿈이 되살아나 그것을 향해 한 걸음 내딛으라는 충동이 문을 두드렸다.
먼저 흙집을 짓기로 했다. 명상 모임을 열 장소가 필요했다. 집 지을 돈도 없고 마땅히 도와 줄 이도 없어서 일이 어떻게 진행 될지 알 수 없었지만 무작정 시작했다. 마침 일을 돕겠다는 이가 있었기에 그것을 실마리 삼아 시작을 한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켜보는 것이었다. 집 짓는 일에는 여러 사람들의 관계가 얽혀 있어, 그 관계가 삐거덕거릴 적마다 집 짓는 일도 멈칫거렸다. 그렇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일은 꾸준히 진척된다는 것이었다. 집 짓는 일에 서툰 사람들이 모여서 뚝딱거렸으니 상식적인 눈으로 바라볼 땐 속 터지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걱정하고 수군거렸다.
“집이 제대로 지어질까?”
집이 지어지는 중에 수술로 다 제거되지 못했던 종양이 다시 커져 재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 시기에 암 환우들을 위해 사랑의 쉼터를 만든 안기순님을 만났다. 쉼터는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왔지만 입원을 할 수 없는 환우들이 거처하면서 외래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련 된 곳이었다.
나는 첫 번째 수혜자가 되어 그곳에 기거하면서 방사선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 동안에 안기순님은 다른 환우들을 소개해서 만나도록 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사랑의 쉼터 모임이 생겼다.
모임에서는 영적 나눔이 주가 되었다. 그것이 안기순님과 내가 원하는 것이었고, 다른 벗들도 원하는 것이었다. 모임은 내게 역할을 알려 주었다. 그것은 아픈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아픈 이들은 지극한 행복의 문 앞에 있는 사람들이란 걸 깨달았다.
치료를 마치고 돌아오자 나는 집을 마무리 짓는 일과 모임을 시작하는 일로 분주해졌다. 그 기간 동안에 테마를 갖는 생태 공동체를 구체적으로 꿈꾸기 시작했다. 생태적인 삶과 대안의학이나 대안학교 등에 관심을 가진 이들도 만나게 되었다. 사람들과 만나 생각을 공유하는 일이 잦아졌다. 오래 전부터 평화롭고 창조적인 삶의 형태는 무엇일까, 하는 물음을 지녀왔던 터였는데, 그 첫 걸음으로 작은 생태 공동체가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게다가 내가 사는 진도는 산과 바다와 들이 어우러진 곳이어서 이러한 공동체를 이루기에 아주 좋은 장소라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진도군에서 추진하려는 아리랑 마을이나 예술인 마을 등의 계획이 있어, 그것과 어우러지도록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사이 나는 한 번 더 항암제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 시기에는 공동체를 함께 이룰 벗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꿈이 아주 구체화된 것이다. 더욱이 그 꿈이 자연스럽게 현실화될 것임을 명백히 알게 되었다. 우리의 깊은 꿈은 무엇이나 이루어진다. 종양이 있고 없고 하는 경계는 없다. 그것은 많은 체험들 가운데 하나로 다가와서 특별한 선물들을 남기고 지나갔다. 그렇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내 안에 있다. 두려움이나 고통, 질시나 회한과 같은 감정들과 함께 기억의 창고 속에 다소곳이 누워 있다. 이제는 그곳에서 나의 도구들이 싱긋 웃음을 보내고 있다. 눈을 감으면 감미로운 평화 속에 모든 것이 녹아들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