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는 오랜 역사 동안 외부의 적으로부터 국가를 구하고자 충성심(忠誠心)을 발휘하는 훌륭한 장수들이 많은 호국의 고장이다.
고려 때는 반외세 자주 국가 건설을 위해 삼별초들이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진도 용장산성 안에 고려왕국을 건설하고 대몽항쟁을 벌였을 때도 진도군민들은 모두 합심하여 삼별초군을 도왔다.
또한, 조선이 일본에게 침략을 받아 7년 전쟁을 벌일 때 가장 중요한 명량대첩에서도 진도군민들은 모두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이순신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군들에게 적극 협력하였다. 그래서 이순신장군의 많은 기록에서 “진도”와 “벽파정” 그리고 “벽파진”이라는 단어를 쉽사리 찾아낼 수 있다.
그러니까 이순신장군이 명량대첩을 전후로 하여 중심으로 인식했던 바다는 바로 진도에 있는 벽파 앞바다였다.
그 사실은 이순신장군이 직접 기록한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을 자세히 살펴보아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후대 명량대첩의 대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688년에 대제학 이민서에 의해 씌여진 명량대첩비의 첫 문장에서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벽파정이 명량대첩의 대승리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전략적 요새였으며 이순신장군의 모든 리더십과 아이디어가 집결된 곳인지 우리 진도군민들의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명량대첩의 대승리를 위해 벽파진에 머문 이순신장군
벽파정은 이순신장군이 무려 17일 동안 머물면서 일본군과 벽파진해전을 치루어 승리한 승전지이고, 수군을 정비하여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호국의 현장이다.
명량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후 이순신장군은 직접 선조에게 보고한 승전 내용에서 벽파정에서 크게 이겼다고 말했을 정도로 이순신장군은 벽파를 거점으로 해전(海戰)을 준비했고, 그 당시 직접 천거한 진도군수 송덕일과 긴밀히 협조하며 진도 충신(조응량,조명신 父子, 박헌, 김수생, 이천귀, 양응지, 양계원, 박종 등)들과 목숨을 건 전투 끝에 명량대첩을 대승리로 이끌었다.
바로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기록된 17일 동안의 벽파진에서의 이순신의 탁월한 리더쉽을 현대인(특히, 기업인,중,고,대학생)들에게 정신강화 훈련 교육을 시키기 위해 벽파정을 복원하고 이충무공 정신을 본받기 위한 호국체험관을 설립하여 건강한 국민으로 만드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한다.
명량대첩의 수뇌부는 바로 벽파진에 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로 이순신장군이 직접 쓴 <난중일기>를 들 수 있다.
선조실록에 나타난 명량대첩과 진도 벽파정
선조실록에서 우리는 명량대첩에 대한 충무공 이순신장군에 생각을 잘 알 수 있다. 이순신장군이 직접 보고한 치계에 의하면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 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운바” 승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운 이순신의 바다가 바로 진도 벽파정 앞바다라는 사실을 이순신장군 자신이 직접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주목할 만하다.
명량대첩비에 나타난 명량대첩과 진도 벽파정
명량대첩비는 명량대첩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보물 503호로 비문 내용은 1597년(선조 30) 9월에 이순신이 진도 벽파정 아래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급류를 이용해 일본선단을 무찌른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이충무공전첩비에 나타난 명량대첩과 진도 벽파정
이충무공전첩비는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한 노산 이은상이 글을 쓰고 진도출신의 명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글씨를 써서 1956년 진도군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비다.
이순신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노산 이은상이 글을 지어 벽파진에 이충무공전첩비를 세웠다는 것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
노산 이은상의 관점에서도 벽파진은 그야말로 영광스런 역사를 지닌 중요한 곳이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운 곳이 바로 벽파정이 있는 벽파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도와 진도군민들은 정말 “必死則生 必生則死 의 정신으로 죽을 힘을 다해 왜군들과 싸워 전사했다.
그런데 그런 진도 애국지사인 조응량,조명신 부자(父子)의 용전상(勇戰像)이 지금 해남 명량대첩 공원에서 진도 땅을 바라보고 있다.
진도에는 이런 진도 출신의 용맹스런 장수들을 기념할 만한 어떤 곳도 없다.
이것이 진도에 명량대첩 승전 사업을 활성화시켜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끝으로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왜, 우수영이나 다른 곳이 아니라 진도 벽파진에 진을 정해 17일 동안이나 머물면서 벽파진해전이나 명량대첩을 치루었는지 알 수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조류가 약한 곳”이라는 것 때문이다.
진도 벽파진은 진도대교가 놓이기 전까지는 진도의 관문으로 배를 정박하던 곳이었고 지금도 제주도로 가는 배를 운항하고 있는 그야말로 조류가 약해 진을 치기 좋은 곳이다.
또한, 적군의 움직임을 한눈에 관망할 수 있는 선황산과 망바위가 있어 천혜의 요새가 바로 진도 벽파진이다.
거기다가 바로 근처에 조류가 빠르고 목이 좁은 진도 녹진에 울돌목이 탁 버티고 있어 방어와 공격 모두가 용이한 적소가 바로 진도 벽파진인 것이다.
고려 삼별초군이 고려 왕국을 건설한 용장산성과 맞닿아 있는 것만 보아도 진도 벽파진이 얼마나 해군이 정박하기 좋은 훌륭한 요새인지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진도 벽파진이라는 요새를 잘 활용하여 나라의 위급한 위기를 현명하게 극복한 세계 4대 해전사 중에 하나가 바로 명량대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