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공동체 김명자 활동가 기고문
<마을공동체 운동의 원형 - 인천에서의 활동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진도 사천리 주민인 김명자 활동가는 전라남도마을공동체만들기지원센터에서 진행하는 전남마을 행복디자이너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6월 4일에는 전라남도여성프라자에서 열린 교육에서 직접 강사로 나서 ‘마을공동체 운동의 원형’과 ‘자연염색’을 강의했다. 강의 내용에 대한 현장 활동가들의 호응이 높았다. 본지에서는 김명자 활동가에게 요청해 진도군민들에게도 내용을 소개해 달라 요청했다. 보내온 기고문 전문을 싣는다.
▲ 6월 4일 전남여성프라자에서 열린 행복디자이너 교육에서 김명자 활동가가 강의를 하고 있다. 김명자 활동가는 1980년도부터 인천지역 마을공동체를 만드는 활동을 이어오다 남편과 함께 진도 사천리로 내려와 다양한 마을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그리 오래 전 이야기도 아닌 것 같습니다.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세월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고 덕분에 빠르게 잊어버리고만 이야기입니다. 인천의 산동네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었던 공동체들을 경험한 한 사람의 아주 작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인천의 달동네 동구 송림동입니다. 황해도에서 피난오신 분들이 모여서 마을을 만들기 시작한 곳입니다. 전쟁이 빨리 끝나면 고향으로 모두 돌아가리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산동네에 다섯 평, 일곱 평, 크게 열 평 정도의 루핑지붕의 판자로 얼기설기 집을 지어 살던 곳입니다.
얼마 전 광주의 양동, 양림동 사람들의 주거지를 보며 어린시절을 떠올렸습니다. 저희 아버님도 황해도 피난민이시고 어린 처와 백일도 안 된 딸을 두고 내려오셔서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새로이 가족을 꾸려 저희 5녀 2남을 낳으셨다고 합니다.
막걸리 잡수시면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신다는 노래를 부르시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생선장사 하셔서 저희를 키우셨습니다.
제가 대학을 가던 때에 동네 친구들은 신발공장과 식모살이를 간다며 저를 만나러 왔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어머니의 한 덕분에 대학물을 먹을 수 있던 행운아였습니다.
아는 친구가 끌고 간 독서모임에서 처음으로 그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광주가 저렇게 처참하게 당하였는데…… 어머니는 나에게 대학을 나와 좋은 곳으로 시집가고 디자이너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바람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프레스에 잘린 노동자의 손가락을 보고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고문사건 권인숙양의 이야기를 친구들과 몰래 등사하여 전단지를 돌렸고, 인천시내 중심가에서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를 하다 잡히곤 했었습니다.
광주의 처참한 상황이 담긴 비디오는 그렇게 나를 새로운 길로 데려다 놓았습니다.
공장근처 산동네 활동가가 되다
공장에서는 어찌나 위장취업자 색출을 한다며 감시와 감찰이 심하던지 우연히 만난 옛 고향친구가 너는 대학을 가지 않았느냐고 건넨 말 한 마디에 더 이상 공장에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지금은 더불어당 국회의원을 하셨고 인천의 부평 구청장이신 홍미영 선생님, 박종열 목사님, 김정택 목사님 등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인천이 공업도시로 대표하게 되는 공장주변의 산동네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리라는 목표를 가지고 주민운동을 일으킨 선배들과 함께 만석동큰우물 공부방을 이어 만석어린이집을 만들고, 성공회 신부님의 도움을 받아 송림동 나눔의 집이라는 주민센터를 열게 되었습니다.
마을공동체 활동가들의 필독서라 통하는《마을공동체운동의 원형을 찿아서》라는 책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989년 6월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박종기 신부와 김명자, 김미경 활동가와 함께 송림동에서 나눔의 집을 열어 빈민운동을 시작했다…….’
▲빈민지역운동사 발간위원회에서 엮은 <마을공동체 운동의 원형을 찾아서>.
인천이 공업도시로 성장하면서 농촌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어 공단의 근처에 생활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농민 출신의 일용건설 노동자와 공단일자리를 찿아 몰려드는 젊은 노동자 들은 공돌이 공순이로 불리며 공동화장실을 쓰고 닭장이라는 단칸방에서 생활했습니다.
지역의 대다수 주민들도 전라도 어디 어디에서 올라온 가족들로 일곱, 여덟씩 한 방에서 지내는 등 열악한 주거시설, 학교폭력, 오락실, 비행, 가출, 복지소외 등에 그대로 노출된 생활환경이었습니다.
본드를 마시는 아이들, 술에 찌들어 사는 어른들, 젊은 여자들은 술집과 다방에 나갔습니다. 남자들은 프레스에 손이 잘리고도 자신의 잘못이라고 진술서를 써야 하는 현실이었습니다.
몇 명의 목사님들과 성공회 신부님, 홍미영 선생님 그리고 저와 같은 젊은 청년들은 교육 정도가 낮고 생계 꾸리기가 급급하여 당연히 누릴 권리를 알지도 못하는 지역주민들을 보면서 이것이 우리가 그들과 함께할 이유다라고 공감했습니다.
그들의 권리를 대신 찿아 주거나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게 도와 주고, 어떤 방법이 그들을 주체적인 삶의 주인이 되도록 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고민하였습니다.
결론은 먼저 그들로부터 배우고 그들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깨달음 아래, 지역에서 우유배달, 학습지 배달, 신문 돌리기 등등 생활과 일을 함께하면서 산동네의 주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산동네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이웃이 되어 아이들 교육문제, 주거문제 환경공해문제, 경제적인 자립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을사람들에게 묻고 모두의 한걸음을 중요시 여기며, 한 사람의 주민이 되어갔습니다.
인천 지역에서 저와 같은 활동을 하려는 사람들을 모아 연대의 모임인 빈민지역 활동가협의회, 인천지역 주민회를 만들어 도시의 마을 공동체를 실험하고 실현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공동육아, 공부방이라는 역사에 남는 프로그램이 그때 시작되었으며 오늘날 이렇게 마을공동체 지원센터가 생기게 된 것 또한 얼마 오래 되지 않은 과거에 가난한 사람들과 마을에 함께 살아가겠노라고 마음먹었던 사람들의 헌신과 열정이 있어 가능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빈민활동가에서 결혼을 통해 동네아줌마가 되었고, 어느덧 세상은 또 많이 변했습니다.
저는 지금 남편의 고향인 진도 사천리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마을과 이웃들을 위해 무엇인가 할 일이 없을까 고민하다 마을공동체 활동가 과정을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활동가들이 함께하는 전남마을행복디자이너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바라셨던 그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진정한 전남인, 마을을 사랑하고 마을을 디자인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