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나는 진도 설화
임정자 작가, 어린이청소년책작가연대 운영위원장
‘진도’하면 사람들은 가장 먼저 무엇을 떠올릴까? 세월호? 진도아리랑? 씻김굿?
아니다. 개다, 개. 진돗개!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지만) 처음 진도에 왔을 때 나는 호랑이만한 진도개가 커다란 바위 위에서 눈부신 흰털을 바람에 날리며 폼 나게 서 있을 줄 같았다. 우습지만 그랬다. 실제로 보니 우리 동네에서 흔히 보던 백구들과 몸집이 비슷했다. 적잖이 실망했다. 적어도 시베리안 허스키만할 줄 알았는데. 물론 지금은 안다. 시베리안 허스키는 추운 지방 개라 몸집이 클 수밖에 없고, 진도개는 사냥을 하는 개인데다가 남쪽 사는 개라 몸집이 작고 날렵하다는 것을. 내게 진도개는 그냥 판타지였던 거다.
진도개는 상상한 것보다 몸집은 작았지만 숫자로는 절대 실망시키지 않았다. 진도 어디를 가나, 눈길 닿은 곳에는 진도개가 있었다.
팽목바람길은 약 12킬로미터이다. 나처럼 보폭이 좁고 속도가 느린 사람이 여기저기 구경하면서 걸으면 대략 네 시간 쯤 걸리는 길이다. 네 시간 걷는 동안 사람보다 개를 더 많이 만난다. 팽목항의 팽이, 목이를 시작으로 팽목항 상가의 백구 황구 흑구, 팽목마을 백구, 마사선착장 황구(어제는 어린 황구 둘이 더 나타나 짖어대서 깜짝 놀랐다.) 그리고 진성교회 발발이와 황구. 어떤 개는 주둥이에서 목덜미까지가 어찌나 검은지, 마치 잿불 헤집어 찾아낸 군고구마를 누가 볼세라 허겁지겁 먹다 들킨 놈 같다. 마주칠 때마다 웃음이 나와 견딜 수가 없다. 그 개가 진도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진도에서는 어딜 가나 개가 있다. 그 개들을 볼 때마다 나는 ‘진도는 진도야. 널린 개 다 개야, 진도개.’ 하며 걷는다.
진도개들은 석기 시대 때부터 살아온 개라고 한다. 진도에서 살기 시작한 때는 삼국시대부터라고도 하고, 고려시대 삼별초의 난 때부터라고도 하고, 조선 시대에 지산면에 군마목장이 설치되면서 말을 지키기 위해 몽고에서 수입하면서부터라고도 한다. 어떤 게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역사와 혈통이 아주 오래된 개라는 소리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역사를 지닌 진도개가 관련 설화(신화, 전설, 민담 등)를 단 한 편도 가지고 있지 않다. 진도개가 주인공인 설화가 한편도 없는 것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한국구비문학대계>도 살펴보고, <임석재 구전설화집>도 뒤져보고, <진도 사람들 옛이야기>도 들쳐보고. 이것저것 들여다봐도 변변한 진도개 설화가 없다. 대전으로 팔려간 진도개가 그 머나먼 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처럼 귀소본능에 초점에 맞춰진 개 이야기는 꽤 있지만.
왜지? 한참을 갸웃거리다가 문득, 진도개가 진도의 명물이 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진도개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1962년이다. 진도개가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근현대 들어서인 것이다. 그 이전에는 진도개의 지위가 일반 개와 그리 다르지 않았을 터. 그렇다면 설화가 없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진도개가 소문대로 똑똑할 뿐 아니라 매우 용맹하고 충성심이 강하고, 귀소본능이 발달했다면 그런 특성을 드러내는 설화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적어도 한 편은. 다시 자료를 읽어보았다. 역시 눈에 띄는 게 없네, 하는데 갑자기 눈에 들어온 설화 한 편이 있었다. ‘나리 범바위 설화’
제목도 범바위이고, 이야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그렇고, 이 설화의 주인공은 범이다. 그러나 내 눈에는 진도개 이야기였다. 화자의 위치를 조금만 바꾸면 주인에 대한 충성심과 호랑이를 겁내지 않는 용맹스러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진도개 설화가 틀림없었다. 게다가 나리에는 개바위가 있다지 않은가? 이거다!
나는 원 설화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화자의 위치를 바꿔 범바위 설화를 개바위 설화로 재화하기로 했다.
할머니를 지켜낸 백구 – 나리 개바위 전설
옛날에 진도 나리 마을에 백구 한 마리가 살았어. 바닷가 외딴 집에서 나씨 할머니랑 단둘이 오순도순 살았어.
나씨 할머니에겐 식구가 없었어. 평생 함께 살던 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거든. 외로운 할머니는 이제 모든 걸 백구와 함께 했어. 백구도 그런 할머니를 위해 이야기받이가 되어 주고, 일하러 나갈 때면 동무 되어 함께 다녔지.
하루는 백구가 새끼를 낳았어. 그것도 다섯 마리나.
“아이고, 우리 강아지들. 어미를 닮아 복스럽게도 생겼네.”
할머니는 좋아 어쩔 줄 몰랐어. 식구 없어 적적한 집에 강아지가 다섯이나 꼼지락대니 천지가 다 들썩대는 것 같았지.
하지만 백구는 강아지들을 낳은 뒤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어. 할머니는 그런 백구가 너무도 안쓰러웠지.
“백구야, 네가 건강해야 새끼들을 돌보지. 어서 밥 먹고 기운 좀 차려보자, 응?”
백구는 뭐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기운이 없어 그저 웅크린 채 할머니만 바라보았어.
그날도 할머니는 백구 걱정에 마당에 나와 병든 백구 등을 쓰다듬고 있었어. 그새 자란 다섯 강아지는 뽈뽈 대며 마당 여기저기를 뛰어다녔고.
그런데 어디선가 낯선 냄새가 풍겨오는 거야.
큼큼.
‘이게 무슨 냄새지?’
…
‘설마… 호랑이?’
백구는 정신이 번쩍 들었어. 백구는 급히 강아지들을 불렀어.
“얘들아! 호랑이가 나타났어. 어서 숨어야 해.”
“호랑이요?”
어린 강아지들은 생전 처음 듣는 호랑이 소리에 고개만 갸웃거렸어. 장난꾸러기 셋째와 다섯째는 노는데 정신이 팔려 아예 엄마 백구 말을 듣지도 못했지.
“어서 이리 오라니까!”
애가 탄 백구가 왕왕,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늦었어. 호랑이가 어느 새 할머니네 마당으로 들어섰는걸. 배고픈 늙은 호랑이는 사냥감 찾아 이 산 저 산 헤매 다니다, 사냥감 죄다 놓치고 사람 사는 마을로 내려온 거야. 묶어 놓은 개라도 잡아먹으려고 말이야.
그런데 웬걸. 어디서 강아지 소리가 들리지 뭐야. 옳다구나, 저 집이다! 호랑이는 살금살금 할머니네 집으로 다가온 거야.
호랑이는 되똥되똥 달려가는 강아지들을 보는 순간 침이 꿀꺽 넘어갔어. 어흥!
호랑이는 대번에 달려가 꿀꺽꿀꺽, 다섯강아지를 삼켜버렸어. 모든 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어.
백구도 할머니도 모두 마당에 주저앉아 숨도 못 쉬고 벌벌 떨기만 했어. 그런데 호랑이가 이번에는 할머니까지 잡아먹으려고 입을 쩍 벌리지 뭐야.
“안 돼!”
그 순간 백구가 달려나갔어. 병들어 맥아리 없이 눈만 꿈뻑이던 백구가, 총알처럼 밖으로 튀어나간 거야. 할머니가 말릴 겨를도 없이.
“할머니까지 잃을 수는 없어.”
어흥!
호랑이가 달려가는 백구를 발견하곤 급히 뒤를 쫓았어.
백구는 쫓아오는 호랑이가 두렵지 않았어. 백구 머릿속에는 오로지 눈앞에서 잡아먹힌 다섯 강아지와 평생 자기를 돌봐준 할머니 생각뿐이거든.
‘할머니를 지켜야 해.’
불현듯 해안가 낭떠러지가 떠올랐어. 나리에는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하나 있거든. 낭떠러지 아래로는 검푸른 바다가 뭐든지 삼켜 버릴 듯한 기세로 파도를 철썩대고 있었지.
‘그래. 낭떠러지에서 결판을 내는 거야.’
백구는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또 달렸어. 마침내 낭떠러지에 다다랐지.
백구는 낭떠러지 끄트머리에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어. 그러곤 마지막 힘을 다해 오우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어.
겁에 질려 떨고 있던 할머니가 그 소리를 들었어. 할머니가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벼랑 끝에 백구가 서 있지 뭐야. 호랑이는 백구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고 말이야.
할머니는 백구를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어. 하지만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지. 할머니는 울며 기도를 했어.
“천지신명님, 우리 백구 좀 살려주세요. 호랑이 밥이 되지 않게 도와주세요.”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가 닿았나 봐.
호랑이가 사나운 입을 쩍 벌리고 백구에게 달겨드는 찰라, 갑자기 하늘에서 우르릉 꽝꽝 천둥번개가 치더니 호랑이를 돌로 만들어 버린 거야. 백구를 향해 포효하며 달려들던 모습 그대로 호랑이는 돌이 되어 버린 거지.
호랑이와 함께 바다로 뛰어들려던 백구 역시 그 자리에서 돌이 되었어. 하늘도 백구를 호랑이 밥이 되게 내버려둘 수 없었던 거지. 오히려 바위가 되어 오래오래 기억하고 사랑받게 만들고 싶었던 거지.
지금도 나리마을에 가면 용감한 백구 바위 ‘개바위’가 있어. 건너편 신기마을 산에는 개를 위협하며 달려들던 호랑이 바위 ‘범바위’가 있고 말이야. 너도 언제 시간 나면 구경 한 번 가봐. 진짜 신기해.
*tip
○ 진돗개가 등장하는 그림책, 동화책
- 돌아온 진돗개 백구 / 송재찬 글 송진헌 그림 /대교출판
- 애국가를 부르는 진돗개 / 박상률 글
- 진도에서 온 수호 / 임정자 글 사진 /문학동네어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