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 꼴깍 샜는가.
침침한 눈을 손등으로 비비면서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본다.
오늘 넘길 원고 분량 10매에서 5-6매도 채우지 못하고 커서(cursor)는 한 곳에 멈춘 채 조급히 깜박이며 다음 진행을 채근한다. 1초 간격으로 깜박이는 커서는 내 숨을 단축시키는 날카로운 초침인 듯, 난 찔리움 당한다.
날카로운 초침을 피해 노트북 앞에서 벌떡 일어나 틀이 비틀어져 잘 열리지 않는 #자 문을 발로 차면서 밖으로 나온다. 선뜻한, 청량한 공기가 급히 나를 에워싼다. 바다가 한 눈에 척 들어온다.
민박집 마당 끝에 서서 바다를 향해 두 손을 벌리며 찢어지게 기지개한다. 동시에 길게 숨을 내쉬어 안에 채우기만 했던 탄산가스를 뱉어내고 청정한 산소를 들이킨다. 멀리, 가까이 보이는 섬에서 풀어헤쳐진 해무가 바다 위를 흘러 거대한 아메바의 느린 움직임으로 기어 올라온다.
여긴 남쪽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맹골도, 안개의 섬이다.
어제 늦은 시각 1박 예정으로 낚시 가는 후배들을 따라 맹골도에 들어 왔다.
맹골도로 들어가는 배편을 만나기 어려웠던 차, 마침 4인조로 묶어 낚시를 떠난다는 후배들 말을 듣고 서둘러 그들과 함께 마감 임박한 원고를 쓰기 위하여 노트북까지 챙겨 들고 섬으로 들어왔던 바, 그들은 동트기 전 좋은 포인트를 찾아 떠났고 나는 풀리지 않는 원고쓰기를 포기하고 안개 자욱한 바다 앞에 섰다.
저만큼 안개 속에 진도 본섬이 있고 남녘 끝자락에 내 토담집이 있을 터다. 토담집 홀로 지키고 계실 아버지가 ‘막내는 없냐?’ 찾으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제 저녁 식사를 드시게 하고, 오늘 아침 식사와 점심 식사를 따로 따로 챙겨 한 장의 편지를 남긴 채 떠났던 것이 못내 죄스럽다. 어쩌면 한꺼번에 다 드시고 아침을 굶고 계시지나 않을까, 과식으로 배탈이나 나지 않았을까, 하는 조바심에 가슴 속 응어리가 커진다.
그렇더라도 글 써지지 않을 바엔 섬을 한바퀴 돌기로 하고 민박집을 나섰다.
“아침 식사 안하고 으디 가요?”
주인 할머니가 내 등 뒤에서 소리친다.
“낚시꾼들 들어오면 같이 먹지라.”
“아따, 그놈들은 은제 들어올지 몰라. 싸게 들어와서 매생이국 한사발 들이킬쇼.”
나는 할머니의 재촉하는 소리를 떨구지 못하고 되돌아서서 방으로 들어섰다.
향긋한 바다 냄새가 방안 가득했다. 매생이국이었다. 따뜻한 밥에 초록빛 보돌보돌한 매생이국을 앞에 하고 밥상 앞에 앉자, 밥통 속 푸실푸실한 밥에 차디찬 콩나물국을 드실 부친 생각에 명치끝이 울컥했다.
‘울 아부지 으짤끄나.’
효녀 생색내는 것 아니지만 자식된 도리만으로도 죄만스럽고, 고집 부리며 내 곁에 계시기를 원하시는 부친이 짠하다 못해 스스로 원망스럽다. 멀리 출타하지 않고 집에 앉아 원고만 쓰면서 생활비를 벌수는 없을까? 내 무능이 못내 싫다.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가 놓으며 할머니께 말했다.
“속이 영 안 좋아서 나중에 먹을랍니다.”
“으째 속이 안 좋아? 뻔하제, 어지께 밤에 커피를 많이 마시드라니께.”
나는 할머니 말을 뒤로 하고 맹골도 선착장으로 향했다. 갯가 사진 몇 컷 찍고 싶었다. 걷는 동안 안개가 나를 휘감는다. 유난히 많은 안개 때문에, 갯내음 진한 안개에 묻혀 가끔 질식할 것 같기도 하고, 자칫 안개 속에 섬이 흔적 없이 사라지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럴 때 나도 섬과 함께 잠깐 사라질 터다.
선착장엔 아녀자들이 미역을 갈무리하고 있다. 따스한 햇살이 늙어가는 그녀들을 어루만지며 싸안는다. 자근자근 무슨 말을 나누면서도 일손은 빨랐다. 나는 그녀들 곁에 쪼그리고 앉아 미역귀를 뜯어 입에 넣었다. 미끌 거리는 감촉과 씹었을 때 베어 나오는 달큰한 해초 맛이 입안을 즐겁게 해준다.
“맛있네요.”
“어따, 맛있다고 미역귀 다 뜯어 묵으면 안돼야.”
“으이고 동생, 그래봤자 몇 가닥 묵 것는가? 엇소. 많이 묵어도 좋은 것인께.”
나는 그녀가 뜯어서 내미는 미역귀를 받아 들고 우적우적 씹어 먹으며 이른 아침 건져 올린 그물에서 고기를 뜯어내는 고깃배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많이 걸렸습니까?”
“멋이, 아니여. 잡어 맻마리 뿐이여. 먼 일인지 물괘기도 흉년이여.”
어부는 이마에 잔뜩 주름을 접으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늙은 어부가 거들었다.
“풍년들 때도 있것지라.”
허기사, 그럴 것이다. 해가 길면 짧을 때도 있고 가파른 고개를 넘으면 쉬운 내리막길도 있으니까.
나는 햇살 아래 이끼 낀 큰 바위에 앉아 저만큼에서 낚시 바늘에 새우를 끼우는 낚시꾼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맹골도 포인트인 코 밭에 적당히 간격을 두고 앉아 각자 열심히 낚시를 던졌다가 걷어 들였다가 했다. 나는 어제 늦은 시각에 함께 온 4인조 낚시꾼들이 감성돔을 많이 잡았는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오늘은 왠지 어서 맹골도를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느닷없이 큰 바람이 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바다 가운데 서면 평화롭기도 하고 또한 불안하기도 하다.
자연은 노상 변하는가, 바다 위에 떠 있는 아름답고 헛된 구름 기둥을 본다.
수평선 저만큼에서부터 바람꽃 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