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7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전두환 독재정권이 저지른 수많은 조작간첩 사건을 다뤘습니다. 당시 진도 죽림에 살았던 저희 아버님 얘기도 다뤄주었습니다. 덕분에 가해자들을 처벌해 달라는 청와대 청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두 감사드립니다. 열 한 살...... 그날 이후 산산이 깨어진..... '빨갱이 새끼', '간첩 자식'으로 살아 온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써 볼까합니다.
이 글은 1980년 전두환 정권이 고문으로 조작한 소위 '진도간첩단사건'으로 18년 동안 투옥되셨던 저희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입니다.
------------------------------------------------------------------------------
<아버님 전상서>
‘固定間諜 15명 一網打盡’
나는 아버지가 가르쳐준 덕분에 한문사전 찾는 법을 일찌감치 배웠다. 그 당시에 ‘간첩’이라는 한문은 어림짐작했지만 ‘고정’이라는 한문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머리에 뿔이 달린 어마어마한 간첩을 잡았다는 기사 옆에는 아버지의 사진과 한자로 된 昔達胤(석달윤)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기관단총과 실탄, 통신 장비라고 소개된 사진도 아버지의 사진 옆에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쇠붙이들이 아버지의 물건이라는 것이었다.
내 아버지가 간첩이라고 신문이 판정해주었다. 나는 그때 어렸다.
‘어, 이게 아닌데’ 그동안 ‘아버지는 간첩이 아니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던 생각은 엉클어지고 혼란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억울했다.
신문보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마을 사람들은 우리 가족과 말을 섞는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치 카스트제도 계급에 조차 속하지 않는 불가촉천민의 존재가 되어 있었다. 끔찍한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1980년 석달윤씨가 연루된 '진도가족간첩단사건' 보도 내용
초등학교 5학년 여름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조선, 중앙, 동아일보를 모두 구독하셨다. 그 당시의 신문은 모두 세로읽기로 돼 있었고 한문이 섞여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읽고 난 신문을 옆에 내려놓으면 그것을 보았다. 한문을 알 리가 없는 나는 한글과 그림을 위주로 신문을 읽었다. 모든 신문의 1면 헤드라인이 똑같은 제목을 달고 있었고, 사진이나 그림도 비슷했다. 신문에 나열되는 제목과 내용의 순서도 같았다. 내 유년의 기억에서 그 장면은 유독 지워지지 않는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그날 오전에 아버지와 함께 유채 씨를 수확했다. 집에서 나와 솔밭 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어가면 열 평 남짓한 다랭이 밭이 있다. 친척에게 빌려 경작하는 그 밭에는 유채가 자라고 있었다. 유채는 초여름에 수확하지만, 유채 씨를 수확하려면 씨가 다 여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아버지는 그 해 유채씨 수확이 늦었다고 말했다.
오후 2시경, 건장한 사내들이 집에 들이닥쳤다. 순식간에 집안에 있는 모든 가재도구가 그들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앉은뱅이책상의 서랍에 들었던 메모장이며 나침반까지 모두……
잠시 후 그들이 아버지에게 몇 마디 말을 하는가 싶더니, 아버지의 양팔을 꽉 틀어쥐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잠시 다녀 올 테니, 걱정 말고 집에 있거라. 어머니께도 내일 모레쯤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라."
아버지는 미색 점퍼와 고무신을 신은 채 건장한 사내들의 팔에 끼여 검은색 지프차를 타고 떠났다. 내 기억에는 그 날이 8월 21일이다.
그 일이 있기 몇 달 전, 80년 5월에 불안한 소문이 돌았다. 북한 괴뢰군이 쳐들어와 광주 사람들을 총으로 죽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2~3일 안에 미국의 큰 배가 광주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학교와 마을에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 소문은 어린 내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아버지가 연행되기 전 8월 초쯤에, 나는 부모님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친척들이 어디론가 연행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아버지는 당신에게까지 영향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예상하지 않았을까!
그 당시에도 어머니는 생선 행상을 했다. 새벽 일찍 어부들에게서 생선을 도매로 구매하고는 14킬로가 넘는 길을 걸어 행상을 다녔다. 생선이 가득 담긴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서 5일장이 열리는 면소재지로 나가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함지박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떠나질 않았다. 어머니는 30년이 넘도록 생선 행상을 했다. 서울로 이사해 잡곡류 행상을 하기 전까지, 그 생선 비린내와 어머니와 함지박은 늘 하나였다.
아버지가 연행된 그날도 어머니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행상을 다녀오셨다.
"아버지 어디 가셨니?"
"방금 전 어떤 사람들이 와서 아버지와 함께 가셨어요."
어머니는 그 자리에 덥석 주저앉았다. 분신과도 같은 함지박을 꽉 붙들고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뭐라 하시면서 가시더냐?"
나는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 아니, 어쩌면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잠깐 갔다 올 테니, 걱정 말라고 합디다."
그 ‘잠깐’이 18년 세월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음날 오후, 건장한 사내들이 다시 한 번 집안을 덮쳤다. 그들은 구두도 벗지 않은 채 집안을 헤집으면서 무언가를 몹시 찾고 있었다. 몇 가지 물건을 손에 쥔 그들은 그 물건들과 함께 어머니를 차에 태우고 사라졌다. 어린 내 눈에도 그 물건들과 어머니는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세월이 지난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어머니는 그때 진도경찰서로 연행이 되었다고 한다. 유치장에 구금이 된 것이었다. 조사실에서 어머니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내 목을 이 자리에서 베어라. 붉은 피밖에 나올 게 없을 것이다.’
아마도 자식들을 챙겨야 한다는 본능과 생존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어머니 스스로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목숨을 내놓는 결기를 보여줘야만 한다는 오기뿐이었다고 했다.
그 덕분이었을까. 어머니는 연행된 다음날, 집으로 돌아오셨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의 통곡소리는 아침까지 이어졌다. 그로부터 100일쯤 지난 어느 날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멈추었다.
‘내가 이렇게 나앉아 있으면 내 새끼들 다 죽는다.’
어머니는 이를 악물고 남편이 없는 일상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래도록 몸에 밴 생선 행상뿐이었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달라져 있었다. 간첩의 아내에게 어느 누구도 생선을 대주려 하지 않았다. 아니, 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자신도 간첩혐의를 받을 테니까.
신문에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아버지가 나왔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초리와 어머니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 몸짓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우리 집 근처에는 마을 사람들이 얼씬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 가야 했다. 내 귀에 들려오는 건 한 문장뿐이었다.
‘너희 아버지가 간첩이래.’
나는 아버지가 간첩이라고도, 아니라고도 말하지 못했다.
(계속)
--------------------------
2006년 5월 30일, 석달윤씨가 안산시 월피동에 있는 자택에서 부인인 박공심 여사와 당시 사건을 회고하고 있다.
2006년, 기자가 안산시 월피동에 있는 석달윤씨를 만나러 갔을 때 그는 재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온 청원서]
2018년 1월 28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선 지난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시절 간첩 조작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군사정권은 아무런 죄도없는 농부,어부,재일동포, 학생들 선량한 시민들을 간첩으로 몰아 일가족을 풍비박산 내었고 자식들은 간첩의 자식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남은 생을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시 이들을 억지로 간첩으로 몰아 납치,고문,폭행을 자행하게 만든 경찰들 그리고 그렇게 거짓 자백된 증거들을 토대로 이들에게 중형의 판결을 내리고 최고 사형까지 내렸던 판,검사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처벌을 원합니다.
피해자들은 시간이 지나 무죄를 받아 명예가 회복되었지만 이미 가족들은 다 죽고 자신들은 기초수급생활자로 어렵게 살아가지만 당시 이들에게 피해를 주었던 고문 경찰 이근안을 비롯한 판검사들은 아직도 법조계에서 일하며 아주 보란듯이 잘 살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당시 간첩 고문 조작사건에 가담했던 이들에 대한 발본색원과 처벌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국민의 억울한 한을 풀어주는 문재인 정부가 되길 희망합니다.